엄마와 외할아버지

엄마에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이른 아침 전화는 우리 가족에게 암묵적인 금기 사항이었다. 저녁에 하는 전화는 그저 안부를 묻는 반가운 전화이었다. 하지만 낮에 하는 전화, 특히 아침 일찍 하는 전화는 특별한 일이 있다는 의미이다. 10년전 형이 쓰러졌다는 전화를 새벽에 한 이후, 적어도 나는 아침 일찍 전화를 하지 않았다."엄마, 서울가고 있다" 반쯤 울음섞인 엄마의 첫마디에 순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임종이 가까워지신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찾고 있다고 했다. 정정하시다 생각했던 외할아버지는 어느새 삶의 끝자락에 계셨던 것이다. 아이가 생긴 후, 특히 둘째가 생긴 후에는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 엄마에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6시간은 한없이 길었을 것 같다.

엄마의 고향은 경기도,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남도로 우리나라 남북 양끝단에서 살아가다 서로의 짝이 되셨다. 400km가 넘는 거리를 건너 아버지의 고향으로 오신 엄마는 동네에서 "서울댁"이 되셨다. 외지에 혼자 온 서울댁의 어려움을 이루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서울댁의 가장 큰 어려움은 친정에 자주 방문할 수 없는 환경이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20여년전 외할머니의 급작스런 임종때도 엄마는 다른 형제, 자매보다 가장 늦게서야 도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시간을 그냥 흘러보내고 있다보니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사랑하는 아들, 할아버지 소천하셨대, 또 연락할게" 엄마가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셨으면 좋았을텐데,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 그리고 차마 전화를 하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 안에서 엄마는 울음을 삼키며 4-5시간을 가셨을 것이다.

아이들은 장모님께 맡기고 아내와 둘이서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두고 오라는 엄마의 말도 있었지만, 아이들 때문에 반가운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엄마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아이들 앞에서 웃음을 보이려 무던히 노력할 게 뻔했다. 장례식장에서 마음껏 울고, 슬픈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일상에서는 다시 빠르게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다른 조문객 없이 친척분들만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모두들 지쳐보이기 하셨지만, 슬픔을 이겨내시려고 조금은 활기찬 분위기였다. 다행히 엄마의 표정도 나쁘지는 않았다. 외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외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가끔 뵐때마다 식사하시면서 늘 소주를 드셨다. 하루에도 한 병 이상 드셨던 것 같은데 술주정이 심하거나 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목소리는 커지셨지만, 옛날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시는 듯 했다. 가끔 큰이모부가 외할아버지 술 상대가 되시기는 했지만 엄마가 주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런 엄마를 할아버지는 참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와 엄마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의 하루 하루를 들려드리니 참 좋아하셨다. 오랜만에 뵙는 친척분들과도 인사를 나누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100세에 가까우셨던 외할아버지의 나이때문인지 모두들 담담히 받아들이시는 듯 했다.

그래도 가족을 떠나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5일간의 장례절차을 마지고 집에 돌아가신 부모님은, 엄마가 아닌 아버지가 전화를 주셨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처럼 도착하자마자 씻으러 가셨을 수도 있겠지만, 지친 몸과 마음때문에 나에게 전화 하시는 것 조차 힘겨워 하셨을 지도 모른다. 이틀 후 아이들과 화상 전화 속 엄마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아직도 눈이 부어 있었다. 엄마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듯 하다.

외할아버지 마지막 사진